골목 끝, 아침 여덟 시

은색 우편함이 햇살에 길게 늘어져 있다. 아무도 오지 않는 골목인데, 나는 그 그림자 앞에서 한 번쯤 걸음을 늦춘다. 아침 여덟 시의 골목은 참 조용했다. 그 조용함 속에서 우편함의 그림자만 자꾸 내 발끝을 스치고 지나갔다.

은행나무 아래, 낮

그해 가을, 은행잎이 노랗게 타오르던 길이었다. 처음 그 이름을 부를 때도, 마지막으로 부를 때도 나무는 같은 빛을 흩뿌리고 있었다. 바람이 불자 잎이 한 장, 공중에서 빙글 돌아 어깨에 닿았다. 그 무게만큼 가벼운 이름이었는지, 이름만큼 무거운 계절이었는지. 은행잎은 그해 가을 내내, 지금도 조금씩 떨어지고 있다. 그 계절이 두 번 왔다는 것만으로 나는 그해를 평생 기억할 것이다.

골목길, 밤

가로등 아래 하얀 꽃잎이 고개를 숙이고 있다. 이름을 알아보는 순간, 길이 가만히 멈췄다.

지하철, 아침

아침 지하철 안, 창밖이 빠르게 스쳐 지나간다. 그 사람과 비슷한 어깨선이 보였다. 한 정거장 더 가 버렸다. 기억은 그렇게 일을 한다. 아무 준비도 없이 등 뒤에서 불쑥 나타나, 내가 가야 할 곳을 잠시 옆길로 데려간다. 창밖 풍경이 낯설어질 무렵, 나는 그제야 숨을 내쉬었다.

그대에게, 오늘 아침에도 커피를 내렸어요. 설탕을 두 번 넣고 저으면서, 그대가 자주 하던 말이 저도 모르게 새어 나왔지요. "뜨거우니 천천히." 누가 듣는다면 그냥 지나칠 소리지만, 제 입에서 나온 그 말투가 낯설어서 찻잔을 오래 바라보았어요. 그대가 쓰던 그 말이 이제 제 말이 되어 있는 걸 보니, 시간은 참 이상해요. 함께 살던 때보다 지금 더 자주 그대가 말하는 것 같아요. 창문을 열면 찬 공기가 들어오고, 그대라면 이 바람을 '청량하다'고 했겠지요. 오늘 아침은 그 말이 떠오르는 아침이에요.

옷장, 봄밤

걸어 두어도 봄은 그 옷의 주름을 기억한다. 오늘 밤 나는 그 주름을 따라가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