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빛

레벨 4

누군가에게 보내지 못한 편지를, 이름을 지운 채로 여기 둡니다. 받는 사람은 '그대'이거나, 어쩌면 당신입니다.

밤의 편지

그대에게 오늘 하루는 어땠는지. 문득 그대가 쉬고 있을 밤이 궁금해졌습니다. 창밖에는 아무 소리도 없고, 가로등 불빛만 오래도록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네요. 사실 무슨 말을 건네고 싶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그대가 오늘 겪은 일이 조금 무거웠다면 그 무게를 잠시 내려놓아도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혼자서 다 끌어안지 않아도 괜찮다는 말을 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대는 그대 방식대로 버텨왔을 텐데, 누군가 쉽게 괜찮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래도 이 밤만큼은 그대에게 유예가 있기를 바랍니다. 하지 못한 일, 미뤄둔 생각, 아직 풀지 못한 마음까지 전부 오늘은 덮어둬도 좋습니다. 내일이 오면 또 다른 하루가 시작되겠지만, 지금은 그저 천천히 숨을 쉬어도 좋습니다. 그대의 밤이 편안하길, 조용히 바랍니다.

밤의 가장자리

그대에게. 낯선 역에 도착한 밤, 플랫폼에 서 있던 기억이 있다. 가로등 불빛이 젖은 아스팔트 위로 길게 늘어져 있었다. 내 그림자도 그중 하나였을 터인데, 누군가의 그림자와 겹쳐져 어디서 시작되고 끝나는지 분간할 수 없었다. 그날 본 풍경은 지금도 선명하다. 역 앞 광장에 놓인 긴 의자, 바람에 흔들리는 플라타너스, 멀리 보이는 빌딩의 깜빡이는 불빛들. 모든 것이 처음 보는 것인데 낯설지 않았다. 오히려 오래전에 꿈에서 본 장면 같았다. 아마도 여행이란 익숙함을 잠시 거둬들이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낯선 곳에 서면 나도 낯설어지고, 그 낯섦이 편안할 때가 있다. 그림자처럼 분간할 수 없는 존재가 오히려 진짜 같게 느껴지는 순간. 그날 이후로, 가끔 그 플랫폼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정확히 그곳은 아니다. 그때 느꼈던 그 감정의 가장자리쯤. 다시 찾을 수 있을까, 그 경계를.

불 끄기 전에

하루의 마지막은 늘 불을 끄는 손끝에서 끝난다. 스위치를 누르기 전 잠깐, 오늘 있었던 일들이 방 안에 남은 온기처럼 떠 있다. 다 잘한 건 아니었지만, 다 잘못한 것도 아니었다. 그 정도면 됐다고, 오늘은 그렇게 해두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