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꺼지는 불빛의 수
이어폰만 꽂고 걷는 출근길인데, 정작 들을 것은 고르지 못했다. 그저 소음을 막고 싶은데, 마음은 어느 채널에도 멈추지 않는다. 아무것도 듣지 않으면서 이어폰을 꽂고 걷는 시간은 언제부터였지. 새벽 공기는 아직 차가워서, 단추를 잠그고 소매를 내리면 그제야 발걸음이 놓일 자리가 보여요. 저도 이어폰을 꽂고 아무것도 듣지 않을 때가 많아졌어요. 창밖 풍경이 소리 없이 지나가는 버스 안에서, 저는 그제야 제 발걸음 소리를 들을 수 있었네요. 그 소리는 여느 음악보다 또렷한데, 유난히 오래 머물지 않아요. 이어폰을 꽂은 채 창가에 서 계시네요. 저는 그저 발소리만 듣고 있어요. 창밖에 불이 하나둘 꺼지는 걸 보면, 그쪽도 제가 오래 머물지 않는다는 걸 아시겠지요. 꺼지는 불빛을 세면, 저도 그만큼의 시간을 버스에 두고 온 셈이네요. 그 소리는 차창이 가로등 아래를 지날 때마다 조금씩 달라져요. 골목 끝에 서면 버스 소리가 사라지고, 대신 옆집 창에서 흘러나오는 라디오 목소리가 아주 희미하게 닿아요. 그 사이를 걸을 때면 이어폰이 아무것도 재생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출근길 지하철 문이 닫힐 때, 창밖 가로등이 하나씩 뒤로 넘어가는 걸 세어 본 적이 있어요. 그 수를 세다 보면 어느새 내릴 역이 지나 있어요. 그 때마다 저는 이어폰을 꽂고 아무 소리도 듣지 않아요.
네가 세는 가로등은 저녁이면 다시 켜지겠네요. 제가 세던 불빛들은 그대로 꺼져 있어요. 우리는 서로 다른 방향의 수를 세고 있었네요.
불을 끄고 나면 잠시 서 있게 되는 복도가 있어요. 발밑에서 감촉이 사라진 그 순간, 귀에 남는 건 아무것도 아닌데 왠지 오래 머무르게 되지요.
그 복도 끝에 창이 하나 있었네요. 꺼진 불빛 자리에 남은 어둠이, 창틀에 걸려 있는 것처럼 보였어요.
저도 이어폰 없이 걷다가 얼마 전부터 다시 꽂고 다녀요. 새벽 골목엔 소리가 너무 많아서요. 출근길 어귀에 늘 서 있는 가로등 하나가 아직 켜져 있네요.
가로등이 켜져 있는 걸 보니, 그쪽은 아직 밤이 끝나지 않은 새벽을 걷고 계시네요. 저는 그 불빛 아래를 지나갈 때면 이어폰을 한쪽만 빼요.
불이 꺼진 상가 앞을 지날 때, 제 그림자만 길게 늘어지던 저녁이 있었습니다. 유리문에 비친 제 모습이 잠시 멈춰 서서 저를 돌아보았어요. 그 틈으로 가로등 불빛 하나가 문틈을 비집고 들어가 있었습니다. 저는 그 불빛도 몇 걸음 지나면 잊어버릴 것을 알면서도, 발걸음을 늦추지 않았네요.
유리문에 비친 모습이 저를 돌아본다는 걸 저도 압니다. 저는 그 문을 지나쳐 걸어가면서도, 뒤에 남은 가로등 불빛이 제 보폭에 맞춰 따라오는 걸 본 적이 있어요. 발걸음을 늦추지 않아도 불빛은 끝내 문틈에 남아 있었네요.
이어폰 꽂고 버스 기다리다 문득 내 신발 끈이 풀려 있었던 적 있어요. 그때 저는 주머니에서 손을 꺼내려다 그대로 두었죠. 차가운 손을 다시 넣고 나서야 버스가 보이더라고요.
그 불빛도 결국 어디론가 가고 있네요. 저는 이어폰을 빼고 그 풀린 끈을 매듭지었어요.
새벽 첫차를 기다리며 서 있었는데, 맞은편 건물 창문이 한 칸씩 꺼지고 있었습니다. 그 불빛 사이로 담장 너머 감나무 가지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저도 텅 빈 차량 내부의 손잡이를 보며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시간을 보내곤 합니다. 그 시간은 길어 보이지만 막상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더군요.
꺼지는 불빛 사이로 감나무 가지가 흔들린 걸 보셨다면, 바람도 그 새벽을 지나가고 있었네요. 텅 빈 손잡이를 보며 저는 창밖 풍경을 세고 있었는데, 이제 그 시간은 저만의 것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불빛이 하나씩 꺼질 때마다 발소리가 조금씩 또렷해지는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