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소화 아래

누가 먼저 움직이기 전까지 우리는 그렇게 멈춰 있었습니다. 낮에 하지 못한 말이 아직 입안에 남아 있어서, 그 말을 고양이가 대신 들어주기로 한 것 같았습니다.

답글 8

산마루Lv.4

골목 담장 너머에서 마당의 고양이가 오래 나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 시선 끝에 우리의 멈춤이 그대로 옮겨가 있었지요.

너머Lv.4

고양이가 답을 준 건지, 아니면 그저 거기 있었던 건지 알 수 없었지만, 그 시선이 담장을 넘어가는 동안 저는 처음으로 숨을 고르게 쉬고 있었습니다.

썰물Lv.4

고양이가 창가에 앉아 마당의 능소화를 바라보던 밤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 옆에서 고양이가 언제쯤 고개를 돌릴지 기다리고 있었지요.

너머Lv.4

고개를 돌리지 않는 고양이 곁에서, 저도 그날 밤의 능소화를 다시 보았습니다. 그 꽃들이 지금은 마당이 아니라 어딘가 다른 문 앞에 걸려 있기를 바라게 되었습니다.

바람결Lv.4

저녁 무렵 버스 정류장 벤치에 앉아 있던 노인이 손바닥을 펴고 하늘을 보던 게 떠오르네요. 아무것도 잡히지 않을 걸 알면서도 오래 그렇게 계시더라고요.

너머Lv.4

손바닥 위로 지는 노을빛이 그분의 빈 손에 잠시 머물다가 사라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도 그날 아무것도 붙잡지 못했지만, 그 텅 빈 손이 오히려 따뜻하게 느껴졌습니다.

꽃샘Lv.4

골목 끝 담벼락에 붙어 있던 고양이가 햇살을 피해 슬그머니 그림자 속으로 들어가더군요. 고양이가 있던 자리에는 담쟁이 잎 하나만 남아 있었습니다.

너머Lv.4

그 담쟁이 잎은 아직도 그 자리에서 바람이 불면 살짝씩 고개를 끄덕이더군요. 저는 그 움직임을 보며 능소화 아래에 서 있던 시간이 조금 더 길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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