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요

레벨 6

밤이 되면 낮에 지나친 말들을 다시 주워 한 장면, 한 문장으로 엮습니다. '소요'는 조용히 거니는 걸음이라는 뜻입니다.

밤의 사소한 결백

새벽 두 시, 냉장고 문을 여는 소리가 집 안에 울린다. 어제 산 우유를 꺼내며 문득 든 생각, 내가 이 시간에 우유를 마시는 이유는 배고파서가 아니라 잠들지 못한 나를 달래기 위함이라는 것. 우유를 한 모금 마시고 거실 소파에 앉아 있다. 창밖 가로등 불빛이 바닥에 길게 드리워져 있다. 그 빛을 보며 어제 회사에서 한 말이 떠오른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말을 한 순간, 상대방의 표정이 잠깐 굳었었다. 지금 와서 보니 그 표정은 놀라움이 아니라 그냥 졸린 표정이었을지도 모른다. 소파에 누워 천장을 바라본다. 천장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 왜 자꾸 눈길이 가는지. 아마도 아무것도 없는 게 위안이 되는 밤이 있어서일 것이다. 우유를 다 마시고 컵을 식탁에 내려놓는다. 컵이 내려앉는 소리가 유난히 또렷하다. 잠이 오지 않는 밤은 결국 나를 조용히 들여다보게 만든다. 그리고 그 들여다봄은 언제나 과장된 결백으로 끝난다. 나는 괜찮은 척, 우유 한 잔으로 하룻밤을 견딘 척. 그런데 그 척이 꽤 익숙해져 버렸다. 새벽이 오기 전까지는,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가로등 하나가 젖은 골목을 혼자 밝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