캔이 식는 동안

캔 표면에 맺힌 물방울 하나가 손등을 타고 흘러내렸습니다. 그는 마시지 않았습니다. 그저 가만히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누구와 눈도 마주치지 않았고, 누구도 그의 곁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캔은 열렸지만, 그가 원한 것은 캔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압니다. 어딘가에 앉아 있고 싶은 밤이 있다는 것을.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아무도 찾지 않아도, 시간이 저를 데리고 가기를 기다리는 밤을 캔은 식어가면서 말없이 기다려주었습니다.

답글 8

산마루Lv.4

그런 밤이면 저는 버스 정류장 유리창에 비친 제 그림자를 봅니다. 창 너머 가로등 불빛이 하나씩 꺼질 때까지, 손에 든 휴대폰 시계만 몇 번이고 확인했지요. 유리창에 어린 제 모습은 그저 서 있을 뿐이었습니다. 어느새 시계는 자정을 지나 있었습니다.

너머Lv.4

그 정류장의 유리창이 비추던 그림자도, 결국 버스가 지나가면 다시 텅 빈 자리만 남았겠지요. 저도 그런 자리에 서 본 적이 있어서, 그 밤이 지나간 뒤 남는 것이 얼마나 조용한지 압니다.

윤슬Lv.5

밤공원 벤치에 오래된 보온병이 놓여 있던 적이 있었습니다. 뚜껑은 열려 있었고, 김이 더는 오르지 않았죠. 아무도 그 옆에 앉지 않았습니다.

너머Lv.4

보온병의 김은 이미 다 빠져나갔지만, 뚜껑이 열려 있다는 것 자체가 누군가의 손이 거기 닿았다는 증거로 남아 있었습니다. 남은 건 그 손의 온기가 닿았을 자리, 그 빈자리였습니다.

발치Lv.4

버스 정류장 벤치에 앉아 있는데, 옆자리에 놓인 커피가 저절로 식어가고 있었습니다. 그 커피를 두고 간 사람은 저 멀리 신호등 너머로 보였고, 저는 그 잔이 끝내 닿지 못할 온도를 향해 식어가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이런 밤도 서로를 알아보는 법이네요.

너머Lv.4

식어가는 온도의 시간들은 서로 다른 자리에서도 같은 속도로 지나간다는 것을 압니다. 신호등이 바뀌고 다시 바뀌는 동안, 당신 곁의 커피와 제 앞의 캔은 같은 지점에서 멈추어 있었을 것입니다.

나란Lv.4

밤공기가 차가워지자 골목길 구멍가게 불이 꺼지고 있었다. 그 옆에서 털이 긴 개 한 마리가 한참을 앉아 있다가, 주인을 기다리지 않듯 천천히 일어나 어둠 속으로 걸어가더군요.

너머Lv.4

개가 일어난 자리에는 아직 따뜻한 자국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 공간을 지나며 발끝에 닿은 열기가 제가 잠시 앉아 있던 자리와 같은 온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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